SBS드라마 <연개소문>이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다. 작가 이환경(56)이 그려내고 있는 이 연개소문은 그간 ‘정사(正史)’에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가 그려내는 연개소문은 부월도를 휘두를 때마다 장정 여럿이 나가떨어지는 전쟁의 신[戰神]일 뿐만 아니라 안시성 전투에도 직접 참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 장졸들의 사표가 되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전략을 이끌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기존의 역사 인식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이러한 드라마 속 연개소문의 이미지에 혼동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해 이환경 작가는 제작발표회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역사는 『삼국사기』 등 신라의 기록이나 혹은 중국의 기록이 대부분”이라며 “당나라와 손잡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쓴 역사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며 반문한다.
왜곡된 인물, 연개소문
그렇다면 이환경 작가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작품구성을 한 것일까?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출사표에는 비장한 결의가 녹아있다.
“처음부터 중국의 ‘ 동북공정’에 맞서 기획한 작품이다. 정부는 침묵하고 있고, 사학계도 이렇다 할 말을 못하고 있으니, 작가라도 나서서 민족혼을 일깨우겠다는 것이다.”
그가 연개소문의 영웅됨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며 극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일진대, 그의 인품, 성장과정, 업적에 대해서 우리 민족 모두가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나라 국사교육이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그를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악평으로 채워놓은 이래, 그의 이름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지금까지 내려왔다.
역사교육이 절멸한 오늘의 현실에서 드라마 <연개소문>은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듯하다.
그러면 실제로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고구려의 정신을 되살리다
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웅혼한 정신을 이어받아 고구려 말,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그는 망해가는 민족정신의 불씨를 지펴 올려 백전백승의 전과를 이뤄냈던 살아있는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되었다.
연개소문은 일전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당의 협박을 무시하고,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다. 당의 위세에 고개를 숙였던 고성제(영류왕)에 비하면, 연개소문은 당을 그렇게 볼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은 연개소문이 고구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민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보장제 3년(644) 11월 원정명령을 내린다. 정벌의 명분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신당서>의 내용을 베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제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이세민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당나라 명장을 길러낸 최고의 명장
당태종은 당의 위세가 커지자 고구려를 우습게 본 나머지, 휘하 장수 이정의 충고도 무시한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하고 사양했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천위, 하늘의 위엄! 천자를 자칭하는 당태종에게는 자존심을 거스르는 소리다.
이에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 하고 불쾌해하자 이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 토욕혼(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걸린 초상화의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한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정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정이 저술한 ‘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정신을 이은 조의선인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그 병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규원사화》에는 그가 봉황산에서의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이와 아울러 《태백일사》에는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衣仙人)’으로 선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조의선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꺼져가는 고구려의 기상을 되살려 강성해져가는 당의 세력을 제압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 패전 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고성제(영류왕)가 즉위하면서 중원 공략을 포기하고 만다. 고성제는 수군사령관으로 수양제의 침입 때 패수에서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그러나 수와의 전쟁 이후 고구려의 국력이 약해지자 당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고구려가 좌시하고 있는 가운데 당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고성제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건의했으나 고성제는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아졌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왕을 비난했다.
심지어 고성제는 당의 국교인 도교를 수입하여 백성들에게 청강하게 했다. 당이 도교를 장려한 것은 노자의 성이 이(李)씨로 당의 창업자 이연, 이세민과 성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민족 본래의 신교사상과 민족주의로 뭉친 고구려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고구려는 심각한 분열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본래의 뿌리 문화인 신교문화는 점차 쇠퇴하고, 신교문화의 일면을 취하여 성장한 줄기 문화인 유교 불교 도교가 중국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이 중국 삼론종(三論宗)1)의 큰 스승이 되기도 하는 등 고구려의 불교도 꽤 깊은 수준에 이르렀다.
반면 본래의 신교를 숭앙한 조의선인들은 그 위상이 점차 떨어져 고성제는 이들을 천리장성 축조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삼신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을 동원할 것을 주장했던 조의선인은 아웃사이더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일어난 것이다.
출처 : http://www.onnanhwa.com/bbs/zboard.php?id=3_4&no=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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