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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ste의 야기/나의 관심사

배달국(倍達國)과 치우(蚩尤)천황

배달국(倍達國)과 치우(蚩尤)천황

우리 민족은 고조선 이전에 배달국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배달민족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배달국은 '밝달국'이고 '밝(밝다) + 달(응달, 양달하듯이 달은 땅의 의미함)'로 '밝은 나라'라는 뜻이다. 나라의 이름이 의미하듯이 밝은 나라인 배달국은 그 당시 문명 선진국으로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이 어질고 의로웠다. 이 배달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환웅'이라고 불렀으며 또는 '천황'이라고도 했다.

거발한 한웅이 신시를 개천한 후, 우리 조상들은 뛰어난 정시문명인 신시문화를 지손족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야만적인 생활을 하던 지나인(훗날 중국 한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에서 많은 관리들이 파견되었다. 지나가 황제와 천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자 시도한 것은 배달국 14대 환웅(기원전 2,667년)인 자오지(慈烏支, 지나인들은 치우라 명명함)한웅 때이다. 공손씨 헌원(公孫氏 軒轅 - 배달국의 가축담당 관리였던 공손이란 사람의 후손)은 자기도 천자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토착민인 지나족들을 부추겨서 10년간 70여회나 치우천황에게 도전했다. 매번 싸움을 할 때마다 싸움에서 진 헌원이 여전히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기에 치우천황은 군사를 이끌고 몸소 전투에 참가하여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헌원을 격파하니 이 전투를 '탁록대전'이라고 한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헌원은 천자의 꿈을 못 이루니 지나에서 후에 그 소원을 이룬 사람이 진시황제로 시황제는 황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2002한일월드컵 때도 등장하였던 도깨비 장식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황이다. <신시본기>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전군을 81군으로 나누어 정돈하고 갈로산(葛盧山. 葛石山)의 철광을 캐어 칼과 창, 갑옷, 그리고 활을 만들어 무장하고 연전연승 질풍과 같이 쳐들어갔다. 이에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 찼으며 서토(지나)의 백성이 모두 무서워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거에 적도(適都)탁록을 함락시켰다.'라고 쓰여 있다.

지나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는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銅頭鐵額)를 가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치우천황은 지나인들에게 우레와 비를 일으켜 능히 산과 물까지 바꾸는 신통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어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치우천황이 10여 년 동안 황제 헌원을 압도적으로 물리치면서 만고의 무신(武神),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는데 역대 단군뿐 아니라 중국 한고조인 유방까지도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황의 능은 지나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궐향성에 있는데 능의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이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치우의 용맹에 질린 지나인들이 두려움과 함께 동이족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도깨비로 묘사하기에 이르렀고 우리도 언제부터인가 치우천황은 사라지고 도깨비만 남게 된 것이다. 불교가 들어온 ;뒤에는 절 입구에 사천황이라는 수문장이 되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와당에, 장승에, 전철 등에서나 남아 있을 뿐이다. 지나에서는 황제헌원을 지나의 시조로 보고 있으며 성인으로 모시고 잇는데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잃어 버리고 치우환웅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기에 도깨비 형상으로 밖에 남아 있지를 못한 것이다. 그 도깨비의 ;의미조차 모른 채 말이다.


= 부도지의 기록 =

환인씨(桓因氏)나 한웅씨(桓雄氏)처럼 치우천왕(蚩尤天王)도 삼신복본사상(三神複本思想)에 입각하여 흩어진 민족의 재결합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치우천왕은 백성과 더불어 호족(虎族)의 지역을 분치(分治)하고, 황하이북(黃河以北)의 하삭(河朔)에 의거(依據)하였다. 치우천왕은 지금의 (山西)산서 (大同府)대동부 지역을 공략하고, 연전하여 한꺼번에 9제후(諸侯)를 복습시킨 다음 협서성(陜西城)에 있는 양수(洋水)로 출진하여, 복희(伏羲) 이후 700여년간 후국(侯國)으로 있던 유망(楡罔)의 유웅국(有熊國)을 병합하였다.

치우천왕은 이해에 모두 12 제후국을 정벌하여 중원을 재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창힐(倉署). 대요(大撓), 복희(伏羲)의 대를 이은 유망(楡罔), 소전(少典). 소호(少昊). 반고(盤古). 의잔당(殘黨). 공공(工共). 중토웅국(中土熊國)의 헌원(軒轅)이 모두 평정되였다. 蚩尤天王은 기주(冀州). 예주. 준대(准垈)가 모두 점거되자 돈록(豚鹿)에는 성을, 준대에는 집을 지어 살 게 하였다. 蚩尤天王의 능(陵)은 산동(山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궐향성(闕鄕城)에있다.

蚩尤天王은 배달국 18명의 한웅 중 第 14代 자오지 한웅(慈烏支 桓雄)이다. 서기전 2707년에 등극하여 2599년까지 109년간 한웅의 자리에 있었다. 蚩尤天王은 中國의 사기(史記)에는 머리는 구리요, 몸은 쇠요, 쇠와 모래를 먹고, 山과 江의 형태를 마음대로 바꾸며, 안개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괴물이라고 표현할 만큼 武勇무용이 뛰어난 장군 이였다. 산동성에 있는 한시대(漢時代)의 무씨(武氏) 사당(祠堂) 화상석에는 괴물(怪物)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치우천왕이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썼으므로,그리고 고시(矢)와 대궁(大弓),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 등을 개발하여 사용하였으므로 지나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괴물로 표현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