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연호를 폐지하고 서기를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 한국
(얼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국)
올해가 몇 년이나 하고 물어보면 누구나 2004년이라고 하면서 장난치냐는 듯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단기연호로 몇 년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감있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습게도 서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이후입니다.
이전에 사용한 단기연호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로 모든 공문서에 사용해오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1961년에 폐지되었던 것입니다.
약간 웃긴 것은 박대통령때 처음에 미국이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원조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차에는 조건 두가지를 제시하면서 원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조건 두가지가 바로 단기연호를 폐기하고 서기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구정연휴를 폐기하고 신정으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히 보면 그것 뭐 어렵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 두 조건을 내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이러한 것의 그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였기에 그냥 너무나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서기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단기연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중요한 사건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입니다. 눈을 뜨지 못한 어리석음이 후세에 너무나 알게 모르게 암적인 존재로 남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바꾸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못 배운 사람들은 서기를 사용하는 것에 아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정말 그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한번 속고 있는 샘인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측우기 아시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측우기. 선조의 위대한 숨결이 담겨있는 이 세계적 발명품이 국제적으로는 어느나라 것으로 알려져 있는지 아십니까?
아쉽게도 차이나(중국)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로 측우기 왼편 돌받침에 '건륭(乾隆) 경인(庚寅) 5월에 만들었다'고 차이나(중국) 연호가 있기 때문이다. 얼과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조선에서 중국의 연호를 따라 썼다는 것을 국제 학계는 모르고 있어 차이나(중국)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동양에서 연호 사용의 의미가 남다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내용은 측우기가 차이나의 역사에 그들의 것이라고 주장되어지고 세계에서 인증하고 있다는 사실의 기사내용입니다.
측우기가 중국의 발명품?
2004/10/06 오후 2:07 | 우리역사 이야기 | 인문/사회과학
[앵커멘트]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는 중국이 한국 과학사의 위대한 발명품인 측우기를 자신들이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방관하는 사이에 이같은 주장이 이미 전세계 학계에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진두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중국에서 출판된 '중국의 기상학사'라는 책입니다. 표지에 우리나라의 측우기 그림이 들어가 있고 책의 본문에는 측우기 사진 밑에
청나라 건륭 시기의 우량기라는 설명까지 붙어 있습니다.
6명의 대표적인 중국 과학사학자가 함께 쓴 '중국 과학기술사고'에도 우리가 보존중인 측우기가 청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며 이를 조선에
보내 준 것이라는 주장이 실려 있습니다.
이같은 주장은 이미 중국 내에서는 정설로 굳어졌고 서양의 다른 학자들도 대부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박성래, 외대 사학과 교수]
"이미 중국 뿐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 과학사학자들도 측우기가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측우기를
자신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는 측우기를 놓는 판인 측우대의 뒷면에 쓰인 건륭이라는 연호 때문입니다.
건륭은 청나라 초기의 황제인 고종의 연호입니다.
전문가들은 중국 학자들이 우리나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해 왔음을 알지 못해
이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측우기란 단어는 우리 사료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측우기는 우리의 발명품이 분명하다고 못박았습니다.
[인터뷰:전영신, 기상청 연구원]
"측우기란 단어는 중국 역사책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역사책에만 측우기란 명칭이 나오고 또 그 것을 이용한 관측 자료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중국 것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측우기를 되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과학자들은 국가 차원에서
명확한 증거를 전세계 학계에 알리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측우기 뿐 아니라 다른 과학 유산도 중국제로 둔갑하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YTN 김진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양에서 연호의 의미가 남다르고 정부수립 후 줄곧 사용해오던 단기가 군사정권 들어서고 폐지되어 혼용조차 하지 않은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차이나(중국)과 일본은 어떠할까요?
차이나(중국)은 고대부터 사용해 왔으며 현재 민국(民國)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645년에 다이까(大化)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다가 이후 천황이 제정권을 가졌던 시대에는 천황 즉위시나 천재지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연호가 개정되었으나, 메이지(明治)시대 이후에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에 따라 천황이 죽어 왕위를 계승할 때만 연호를 개정토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서기를 병행하여 쓰기도 하지만 자국내에서는 여전히 연호만을 고집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 외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인조차 서력 연호 사용에 혼란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를 볼때 차이나(중국)와 일본과는 달리 1만년(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참고로 단기연호는 단군조선 시대인 단군왕검(1대 단군)을 기준으로 세워진 연호입니다. 단기연호가 폐지된 지 43년.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3․1 운동의 이념을 보여주는 기미독립선언문에는 '조선건국 4252년 3월1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국통을 계승한 정부가 사실상 단기연호를 거부한 셈인 것이죠.
단기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고려말 우왕의 사부였던 백문보였다고 전하며, 단군기원을 뒷받침해주는 고문헌으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후대의 것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권람의 <응제시주> 등이 있습니다.
이후 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조선이 들어서고는 '연호는 황제만이 사용하는 것이지 일국의 제후왕은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대부분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해 오다가 대한제국 말기 고종황제 때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임시정부때 단기연호를 사용하였고. 정식적으로 단기연호를 국가가 채택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48년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한다'고 법제화함으로써 단군조선기원이 국가의 공용연호로 채택되었습니다.
이후 1961년 12월 2일에 단기연호 폐지법령이 선포되어 1962년 1월 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단기연호 사용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내각수반 송요찬의 단군연호 폐지의 이유 설명은 이렇습니다.
첫째, 단기연호는 신화적 연혁에 근거한 것으로 독립선언서에서 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전통을 따랐던 것뿐이다.
둘째, 단기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제반분야에 걸쳐 많은 불편과 혼란이 야기됨에 따라 이를 근본적으로 시정할 필요가 커졌다는 것이다.
단기연호 폐지의 첫째 이유가 '신화적 연혁'이라 하나 단군을 신화라고 규정지은 것은 일제 침략이후지 그 이전 수천년의 우리 역사에서는 전혀 없었던 얘기입니다. 특히, 근래에 와서 식민사관을 탈피한 민족사학이 깊이 연구되어 고조선의 고토에서 발굴된 유물과 새로운 고조선 문헌자료의 발굴 등으로 고조선의 존재는 이미 모든 역사학계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죠. . .
아직도 일부 얘기되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한 단어는 정보의 오류에서 오는 것인데 '단군'은 오늘날의 대통령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국가의 통치자를 일컫는 보통명사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유물․유적이 발굴되어 고조선이란 최초 국가의 존재가 증명된 이상 그 고조선의 통치자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미 역사적으로 47대의 단군이 있었음을 이제는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고려시대를 보면 몇 명의 왕이 있었다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단기연호 혼용에 대한 불편과 혼란이 제기될 수 있으나, 서력과 함께 하면, 문제가 없으며 민족정신의 함양과 상징성을 되찾자는 것이므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도 혼용해서 사용할 시에는 뒤에 반드시 괄호를 붙여 서기를 사용합니다)
역사는 눈뜬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찾을 때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못 찾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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