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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ste의 야기/뇌 이야기

우리의 고대사가 사라진 배경4 (묘청의 난)

우리의 고대사가 사라진 배경4 (묘청의 난)

 

묘청은 서경(지금의 평양)출신의 승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국가권력과 싸우면서 반란을 일으켰던 승려였습니다. 하지만 묘청은 불도의 승려 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 수련법인 신선도(선도)를 수련한 도인이자 동시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서경에 지은 임원국의 팔선당에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산신을 문수사리보살이라 이름 붙여 모셨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를 육통존자라 이름 붙여 그 다음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묘청은 불교라는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서 도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선도의 전통 사상가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사상인 신선도 또는 풍류도는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남조신라가 당나라의 문화에 깊이 젖어듦에 따라 더욱더 위축되어 왔으며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긴 묘청일파가 사대주의 사상에 물든 김부식일파와의 사상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묘청의 난인 것입니다.

이러한 힘겨루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자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나 너무 급하게 일을 서두르다가 오히려 김부식에게 역습을 당하게 됩니다.

묘청이 처음부터 반란을 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묘청은 새로운 나라 이름과 새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임금을 세우지 않고 자신들의 거사를 스스로 개경 정부에 통보하였습니다. 이는 묘청의 거사가 왕권에 도전하는 반란이 아니었으며 천박한 욕심으로 이르킨 단순한 권력투쟁도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묘청은 유학만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개경의 기득세력인 문벌귀족들에 의해 전통사상인 신선도와 국교인 불교가 변질되고 약화되는 것을 바로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또 묘청이 목숨을 걸고 벌인 거사는 김부식 같은 유학자들에 의해 고려가 중국화되는 것을 막고 작은 고려에서 벗어나 고구려를 본받자는 운동이었으며 중국의 사상이 고려를 지배하는 것을 거부한 고려 재건국 운동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근래 민족주의 역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 1천년 이래의 대사건"이라고 평가하면서, 묘청의 실패를 민족고유의 전통사상에 대한 김부식 일파의 사대주의 승리라고 보았습니다.

 

묘청의 거사가 실패하고 본격적으로 중국화시키기 시작했으며 어떤 전란보다도 우리의 전통 역사를 단절 왜곡시키는 데 큰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어설프게 시작한 묘청의 실패로 우리의 고유사상은 현실정치 사상에서 물러나 재야로 숨게 되고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신라중심사관, 사대주의 사관으로 기록하고 다른 사관으로 쓰여진 역사서를 수거하여 없애버림으로 이때부터 우리의 정신이 주체성을 잃게되는 결정타를 맞게 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후 그들의 정당성을 위해 기타 민족 사서 연구 등을 금지 해 왔으며, 그러한 학자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몰아 결국 사회에서 매몰 시켰으며, 이들은 숨어 숨어 그 명맥을 이어오게 된 것이죠..

 

묘청의 난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것은 난이라 표현하는 것조차 잘못된 표기이죠.. 구국 회복운동이 역적들에 의해 실패한 실로 안타까운 사건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