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날조작업(동북공정)의 두 번째 음모
지난시간에 소위 동북공정의 첫 번째 음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이런저런일로 급히 글을 작성하다보니까. 오타가 여기저기 보이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동북공정 두 번째 음모에 대해 말씀드리려는데, 학교장님께서 동북공정관련 시사안보교육의 기회를 주셔서 이미 다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날 참석 못하신 분들을 위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사안보 교육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는데, 파워포인터 등 많은 자료 작성과 조언을 정비학처 유기열 소령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비롯해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소위 동북공정의 두 번째 음모인 현재 차이나의 영토로 알고 있는 간도땅 즉, 광활한 만주벌판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동북공정의 가장 현실적인 그들의 전략이 바로 이 두 번째 문제인 간도땅의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지난시간에 차이나가 우리 조선족들에게만 그들의 역사관을 심는 교육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현재 효과를 얻고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연변 조선족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당연히 중국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물며, 차이나와 우리가 축구를 하면 차이나를 응원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일제치욕시대에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역사교육을 주입시키는 것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있는 셈입니다. 그 효과가 있거던요.. 현재 우리나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차이나의 관리가 우리나라에 와서 차이나의 역사왜곡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오고 갔습니다. 소위 동북공정의 시작이 차이나 정부에서 한것이 아니라고 하다가 최고 정부에서 지시한 공문이 발견된후에 앞으로 정부차원에서 지시를 하지는 않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도 구두약속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외교부 홈페이지에 고구려가 한국것으로 되어 있었던것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복구하라고 하니까. 아예 한국 역사자체를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은 복구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갔습니다. 이건 완전히 배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서 한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그것이었거든요.. 즉, 내용인즉, 한국 일부에서 간도가 한국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정부차원에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요구를 하고 갔습니다. 우리정부에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구요..
이것은 완전히 뺨때리고 얼러고 하는 식입니다. 오히려 양보하는 것처럼 하면서 이빨을 들어내는 형태인 것입니다. 우낀 놈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목적을 살며시 드러내면서 선수를 치고 간 것입니다.
즉, 고구려사 왜곡을 통해 그들의 두 번째 음모인 통일한국후 간도땅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원래부터 그곳은 차이나 땅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1차 음모인 북한 땅 문제에 대해 참고 설명 드리면 실제로 현재 북경대학 모 교수가 열심히 노력해서 북한땅을 중국땅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라고 젊은 대학생들에게 강의까지 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얼마전 압록강 도하훈련도 했었죠..
간도땅 말이죠.. 그게 차이나 것이 아닙니다. 그게 이전부터 백두산 정계비문제로 말이 많았거든요.. 토문강 문제 말이죠. 물론 차이나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기지만 이상한것은 왜? 그럼 정계비를 두만강이 보이는 곳에 세우지 않고 반대쪽에 세웠냐는 것이죠.. 그것도 100여리나 떨어진곳에 말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차이나의 한족은 역사적으로 간도땅을 한번도 점령해본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다행인것이 간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지도가 요즘 많이 발견되고 있죠..
그래서 간도문제를 좀 깊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간도문제의 시작점을 알아보겠습니다.
1. 간도 문제의 시작점..
˝윤관의 동북 9성이 간도분쟁의 출발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1107년(고려 예종 2년)은 발해 멸망 이후 우리 민족의 영토가 다시 두만강 이북 만주까지 확장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해입니다. 고려 예종은 윤관을 시켜 동북면의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설치토록 하였죠..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고려가 국시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영토확장에 나섰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윤관은 여진 정벌 후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인 선춘령에 고려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운는데, 이 비는 윤관비 또는 선춘령에 세워졌다고 해서 선춘령비라고 불렸습니다. 선춘령에 영토확장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죠..
〈고려사〉에 따르면 여진 정벌 이후 고려는 상서 유택을 함주 대도독부사로 삼고 영주-복주-웅주-길주와 공험진에 방어사를 설치하는 등 이 지역을 고유의 행정체계인 주(州)와 진(鎭)으로 편제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영토분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이후 이 지역에 추가로 설치된 의주-통태-평융 3성을 합쳐 동북 9성이 성립됨).하지만 불과 1년 5개월 정도가 지난 1109년 7월, 고려는 9성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동북 9성 개척 당시 기록을 보면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칭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고려는 여진족을 적대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고려가 다시 9성을 돌려준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미를 담은 결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 고려가 여진에게 돌려준 9성은 길주-영주-복주-함주-웅주와 숭녕-통태-진양-선화진으로 최초 설치된 9성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9성 가운데 가장 북단에 위치한 공험진이 빠져 있고 2년 뒤인 예종 6년에 공험진을 산성으로 수축했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의 영토는 동북 9성 양보 이후에도 여전히 두만강 이북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두만강 이북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본격화했습니다. 원나라 멸망 이후 옛 공험진 지역은 여진족 거주지로 태조 이성계의 세력권에 있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영향력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 명의 영락제는 왕가인을 만주지역의 여진에 보냈는데,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해 여진족을 직접 관할함으로써 이 지역을 편입하겠다는 의도로 볼수 있죠..
이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아하는 중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에 태종은 영춘추관사 하륜과 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고려의 〈예종실록〉에서 윤관이 여진을 치고 변경에 (선춘령)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료에 따라 지도를 작성하는 한편 계품사 김첨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의 여진족은 조선 관할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명은 태종 4년 10월, 공험진 이남 지역을 조선 영토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고려의 옛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조선 초기의 영토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입니다..공험진이 우리 영토의 경계라는 인식은 세종 때에 최고조에 이릅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윤관의 동북 9성에 대한 세종의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요약된 내용을 보면.
[동국지도] 공험진-선춘령 표시〈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편을 보면 ˝준령이 백두산에서부터 기복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어 있어, 1천여 리에 긍한다. 북쪽은 야인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천7백여 리다˝라고 서술하여 조선의 동북 경계가 두만강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하라고 명한다.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혀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중략)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9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 쪽에 있는가, 상거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이와 같은 세종의 영토의식은 당시에 만들어진 지도에도 충실히 반영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정척과 양성지가 세조 9년에 완성한 〈동국지도〉를 보면 두만강 이북에 공험진과 선춘령이 뚜렷하게 표시돼 있다〈동국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지도다. 따라서 〈동국지도〉 제작자들이 공험진과 선춘령 위치를 직접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일본 학자들의 '동북 9성 함흥평야 위치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우리의 역사 서술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관이 개척한 공험진을 목표로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세종과 김종서의 6진 개척은 두만강 이북을 넘지 못하고 멈춰서고 만다. 그리고 고려의 동북 9성과 선춘령비는 잠시 잊혀진 역사가 되게 되었습니다.
2. 현재 구성된 간도문제(간도협약)
간도협약 무효화될 수 있다" 간도협약이 무효화될 경우 한-중간 국경 문제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당시로 소급될 수 있다. 백두산을 선조가 태어난 영산으로 여기던 청의 강희제는 목극등을 백두산으로 보내 조선과 청의 국경에 정계비를 세웠다. 강압적으로 백두산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문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라고 씌어 있다. 백두산 정계비에 의해 백두산 천지는 청의 영역에 속하지만, 조선은 토문강을 국경선으로 삼게 되므로 두만강 이북의 간도를 인정받은 셈이 됐다. 토문강은 송화강의 지류로서 흑룡강에 이르는 지역까지 아우른다. 흔히 동간도라고 일컫는 이곳은 현재 중국의 옌벤(延邊)자치주 지역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정계비에 '토문'이라는 강의 명칭이 논란이 됐다. 청은 토문이 두만(도문)강이라고 고집하면서 영토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청은 1883년(고종 20년) 동간도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두만강 이남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조선과 청은 1885년(고종22년) 을유담판, 1887년 정해담판을 통해 국경협상을 벌였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 문제는 결국 간도협약으로 귀결돼 결국 두만강이 접경선이 되고 말았다.
북한-중국간 비밀조약도 변수 최근 〈잊혀진 고토, 만주의 역사〉를 집필한 김득황 박사는 "정계비에 나타난 '분수령'의 의미를 볼 때 백두산 정계비에 연결된 강은 압록강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뿐이며 두만강은 이 인근에 있는 강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건천(마른 강)인 토문강의 경계선을 뚜렷히 구분하기 위해 울타리를 만든 사실까지 확인되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정계비와 관련없이 조선과 청나라의 진짜 국경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인조5년) 후 조선이 청에 보낸 서문(誓文)에 "각기 경계를 봉하여 온전히 지킬 것이다"라는 뜻의 '각전봉강'(各全封疆) 구절이 나온다.
경계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만으론 구체적으로 조선과 청의 경계가 어디인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청의 강희제가 서양인 레지 신부에 의뢰해 제작한 지도(당빌 지도)에 의하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일부 만주 지방도 조선에 포함돼 있다. 김득황 박사는 이 선을 '레지 선'으로 명명했다.
만주 지역에는 이미 15세기 이전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해 땅을 개간 하고 살았다. 지도에는 평안도를 뜻하는 영문 표기 PING NGAN이 압록강 이북에 걸쳐 표기돼 있다.당시 두 차례의 호란(병자-정묘) 후 기세가 등등해진 청은 자신들의 성지인 만주로 조선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금(封禁)했다. 조-청의 국경선은 레지선에서 압록강-토문강으로, 다시 압록강-두만강으로 점점 밀려났다
3. 다시 조명되는 간도땅 (옛지도 발견)
[동아일보]
중국 간도(間島) 지역이 18∼19세기에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지도 5점이 공개됐다.이 지역에는 중국이 최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옛 고구려 수도 환런(桓仁)의 오녀산성, 지안(集安)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등이 있다.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金佑俊) 교수는 7일 중국 청나라에서 1719년 만들어진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의 유럽판 지도 3점을 공개했다.황여전람도의 동판을 사용해 유럽에서 만들어진 이 지도는 ‘듀 알드(Du Halde·1740년)’ ‘보곤디(R. de Vaugondy·1750년)’ ‘윌킨슨(Wilkinson·1794년)’ 등이다.
이 지도들은 현재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두만강과 압록강보다 더 위쪽에 있는 서간도와 동간도 지역을 모두 ‘조선(朝鮮)’ 영토로 표시했다.김 교수는 “이 지도들은 18, 19세기 당시 간도지역이 우리 영토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1998년 중국 베이징(北京)대에서 펴낸 ‘중한관계사’ 등 중국측 자료도 서간도지역 경비를 조선 관병이 맡았다고 기록하는 등 간도지역이 우리 땅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많다”고 말했다.
(좌측위 그림은 조선말기에 바티칸 교황청에서 제작한 지도/두만강쪽 위 영역이 간도 )
한국에 천주교 전파 계획을 위해 제작된 지도
간도문제 요약...
청나라시절 간도를 비롯한 만주일대는 주인없는 빈땅들이 많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거기에 러시아도 들어오고 조선도 들어가고 청나라도 들어가서 서로 자기땅을 만들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과 같이 선으로 쭉쭉 긋는 국경개념도 그무렵 서서히 생기기 시작해서 서로 자기네 국경을 넓혀놓으려고 땅따먹기를 하던 시절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간도와 연해주를 포함한 일대는 주변국들이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을 하던 시절이라서 국경문제가 있을때마다 모여서 국경을 정하곤 했었는데.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청나라와 조선이 합의(사실상 반강제)를 본 것이 국경을 압록강-토문강으로 정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국제법상으로 효력을 갖는다는 것이죠..
근데 문제는 세월이 한참 흐른후 청나라가 비문에 새겨진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다라고 우기는 바람에 간도땅이 국경분쟁지역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청나라는 두만강으로, 조선은 토문강으로 주장하면서 그 이후의 협상들이 계속 결렬되어 합의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에, 일본이 조선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은 간도를 조선땅으로 간주하고 청과 협상을 하다가 막판에 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댓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줘버렸습니다. 그게 간도협약 입니다.. 식민지시절 일본이 만들어 놓은 국제협약들은 해방과 함께 다 무효가 되었는데 이 간도협약만 살아있는 경우입니다.
간도문제는 일본이 중간에 끼어든 그 때 이전으로 돌아가서 정말 토문강이 두만강이냐부터 시비를 밝히고 협의를 해서 국경에 대한 문제를 당사자인 중국과 남북한이 협의해서 국제법상의 효력을 갖는 국경을 정해야 합니다.
지금 압록강-두만강으로 되어있는 국경은 중국과 일본이 정한것일 뿐 중국과 조선 혹은 남북한이 정한게 아닙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국경을 옆나라가 정해주는 나라도 있다니..
현재 북한이 중국에게 백두산을 팔아 넘겼지만 문제는 통일이 되면 이것또한 반쪽짜리 계약이 되고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남북한에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대외적으로 명실상부하게 조선의 정통성을 물려받는거니 조선과 맺었던 협약의 유효성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예전 고구려땅 일부를 중국과 외교적으로 담판지어서 되찾었던적이 있죠.. 서희의 담판 말이죠..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이것으로도 알수 있습니다. (차이나는 고구려가 고려를 잊지 않았다고 주장)
차이나는 당연히 한반도 통일이후 재현될 문제의 싹을 지금부터 잘라버리고 싶은거고,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켜려는 것이죠..
간도에는 한국말과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는 조선족들이 인구의 대부분인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한반도가 통일되고 힘이 쎄지게 되어 통일한국쪽에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면? 차이나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이죠..
그래서 현재 차이나가 만주지역일대 조선족 비율을 낮추려고 안간힘입니다. 그래서 과거 80%에 달하던 조선족 비율이 현재 30%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계획과 술책은 너무나 치밀합니다.
그래서 차이나는 고구려뿐아니라 고조선까지 중국역사에 포함시켜서 조선족들도 중국사람이라는 정통성을 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은 지금 당장은 어쩔 수는 없더라도 통일이후에 이문제를 다시 제기할 수 있도록 법적인 근거를 마련해놔야 될 것입니다. 그 법적인 근거라 하면, 정부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간도협약무효소송등으로 공소시효를 연장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조선족들을 우리민족으로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물론 정부차원의 행동은 남북이 손잡고 함께 하면 좋겠지만 현재 상황으로서 북한 그럴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설사 남북공동은 안된다 하더라도 남한이라도 이의를 제기해서 공소시효를 연장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이죠..
간도땅이 어디서 어디까지냐도 아직 확실치 않은데, 크게 봤을 때 연해주를 포함해서 한반도 전체의 2/3에 크기에 해당하는 땅이고, 작게봐도 남한의 1/2보다도 큰 엄청나게 큰 땅이었다는 증거들이 조선 말기 지도에서 나오고 있죠.. 전부다는 못 찾는다 하더라도 몽땅 그냥 빼앗기기는 너무하다는 생각 듭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정통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더욱 안타깝죠.. 우리손으로 직접넘겨준 것도 아니고 일본애들이 넘겨준것입니다. 일본에게도 좀 큰소리 쳐야 합니다. 니네들이 책임져라.. 고 말이죠.. 그럼 사소한 독도문제로는 말도 못 하겠죠..
2차 간도문제
그리고 사실 간도 문제는 중국과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러시아는 대체 뭐냐는 거죠..
그 전까지만 해도 만주동네에서는 찾아볼 수 도 없던 유럽 국가였는데 야금야금 동쪽으로 오더니 어느날 갑자기 연해주를 넘겨받았다가 중일러 지네들끼리 짜고 여러 조선땅들을 나눠가진 것입니다.
연해주는 간도협약에 의해서 청나라로 넘어가고, 다시 청이 러시아에 넘겨준 것이니 간도협약이 무효가 되어야 연해주도 원래대로 조선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두만강 하류 여러 섬들이 있는데 이것 또한 러시아로 넘어 가 있습니다.
그런데 국경이라는 것은 전쟁을 하던 강제로 빼앗던 100년이 지나면 국제법상으로도 그 땅의 관리자가 그 땅주인인거로 인정해버리는 것이 국제적 통례입니다.. 1909년 간도협약을 시점으로 삼는 경우에 그 공소시효의 마지막이 되는 100년이 2009년으로 이제 얼마 안남았죠....
공소시효 연장 안하면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욕먹을 각오를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야 겠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역사를 아는만큼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광할한 만주벌판에서 독립군 선배님들께서 피땀 흘겨가면서 지켜온 우리 역사를 오늘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켜올수 있었던 것은 민족혼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혼 말이죠..
내용이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 ^ *
'Namaste의 야기 > 뇌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건국신화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0) | 2010.03.04 |
---|---|
동북아시아 역사날조작업(동북공정)의 세 번째 음모 (0) | 2010.03.04 |
동아시아 역사날조작업(동북공정)의 첫 번째 음모 (0) | 2010.03.04 |
독도에서 만주로...(이미 20년 전에...) (0) | 2010.03.04 |
3원론의 붕괴는 우주질서의 붕괴 (공손헌원의 실수) (0) | 2010.03.04 |